본문 바로가기

보물창고

옛날 사람집,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를 다녀와서...

 

 옛날 사람집...ㅠㅠ

우리 예림양에게 이해되는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전 시도기념물 26호이기도 한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림양과 함께 갔습니다.

생가가 위치한 곳은 대전에서 30여년을 산 제게도 생소한 어남동이라는 곳.

대전 오월드 갈림길에서 오른 쪽길로 가시다 보면 신채호 선생 생가를 알리는 표지판들이 중간 중간 있어서 찾아가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더군요.

가는 길 곳곳에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가을 정취를 더합니다.

잠시 내려서 사진이라도 한장 찍고 싶지만 마땅이 차댈 곳이 없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기냥 갑니다.

뭐 통행량이 많지는 않지만 우리 예림양, 귀찮은 듯 싶기도 하고, 애 데리고 갓길에 서 있는다는 게 부담도 되고 해서요.

가는 도중 우리 예림양 역시나 말이 많습니다.

"어디가?"
"..."
"어디가냐교?"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지 난감합니다.ㅠㅠ
"어 옛날에 우리나라가 일본이라는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괴롭힘을 당했거든? 그때 우리나라를 위해서 힘든 일을 한 선생님이 태어난 집에 가는 거야"
"그럼 그 선생님 지금도 있어?"
"아니 일본 사람들이 괴롭혀서 돌아가셨어."
"그럼 일본 사람들은 지금 있어?"
"..."
"지금 있냐고"
"지금도 일본 사람은 있기야 하지..."
"옛날 사람집이네!"
"..."
여기서 얘기를 끊어야 했습니다.

잠시후
"거기 사람들 많아?"
"글쎄?"
"차들도 별로 안다니네?"

"..."

참고로 우리 예림양 사람이 없는 곳은 싫어합니다. 심심하다고ㅠㅠ
우리 예림양에게 교육적 차원의 목적은 전혀 없습니다. 

일단 목적지까지 갑니다.ㅠㅠ



(신채호 선생 생가 좌측에 위치한 산)

(예림양 때문에 걱정했는데, 역시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ㅠㅠ, 일단 심심하다고 빨리 가자고 난리부터 칠테니까...)

(은행나무였던가? 단풍나무였던가?, 아 아주 큰 은행나무였던 것 같네요^^;;)

(좋게 말하면 단아한 모습이 신채호 선생님의 모습같기도 하고, 좀 한적해서 슬퍼보이기도 하고 그러네요.)



(흐음, 마루에 녹슨 못들이 떨어져 있네요. 쩝 다행히 예림양은 못봤습니다. 봤음 또 말도 안되는 말도 많았을텐데. 관리는 전혀 안되는 듯 합니다. 웬지 모를 서글품...) 

(단재헌, 신채호 선생님의 호를 딴 편액(?)이 그나마 꼿꼿해 보입니다.)

(여기 저기 창호지에 구멍이 뚫려 있네요.)


(생가 주변엔 쓰레기가 여기 저기 있네요. 그래서 주웠냐고요? 죄송합니다. 못 주웠습니다. 예림양 가자고 난리부리는 통에...)

(신채호 선생님 생가의 유허비입니다. 유허비의 뜻을 찾아 보니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네요. 하얀 대리석 거북 조각상 위에 있습니다.)


(대청 마루에 앉아서 사진 한장 찍으라던 예림양, 대청마루가 맘에 안들었는지 거기서는 안찍더니 유허비에선 한 컷 선심쓰듯 찍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빨리 가자고 보챌 때는 언제고 사진 한 컷에 금세 포즈를 취합니다. 푸하하하~~~)

우리 예림양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신채호 선생 생가에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찾아보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커피 한잔 뽑아 먹을 수 있는 자판기도 있음 좋겠구, 휴지통도 하나쯤 있음 좋겠구요^^.

교육적인 장소로 참 좋은 곳인 듯 싶은데...

시간의 흐름 속에 나라를 위해 애쓰신 분들의 자취들이 이렇게 하나 둘 잊혀져가는 게 아닌지 아쉬움과 여운을 앉고 예림양 말대로 그냥 갑니다.

아마 담에 다시 한번 오자고 한번 안올듯 싶네요.

예림양에게
신채호 선생 생가 = 옛날 사람집
이 아니었음 싶네요...


신채호(1880. 12. 8 ~ 1936, 2. 21)
신채호는 한말 일제시대에 역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으며 26세가 되던 해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 기자가 되었다.

1905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그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을 써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였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임통치에 반대하였다.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 운동사상 가장 강건하고 웅장하면서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제시한 문서로 손꼽힌다.

선생은 1928년 대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1992년 여름, 선생의 생가를 발굴 조사하고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문화재청 발췌)